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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업무 환경 설계 (1)
2025-12-12
지금의 업무환경, 과연 AI 시대에 맞는 공간일까요?
Ch.1 오피스는 왜 지금의 모습을 띄고 있는걸까?
● 업무환경은 기술 발전에 따라 진화해왔다.

수많은 현대 도시인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오피스에서 보냅니다. 과거에 전략 컨설턴트와 벤처캐피탈 애널리스트로 근무했던 개인적 경험에 빗대어 말하면, 광고 대행, 법무법인과 같은 전문 서비스업류의 지식 노동자들에게는 절반이 아닌 80%가량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애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공간은 대체로 흰색 벽체와 천장, 개인용 컴퓨터가 중심으로 배치된 평평한 책상과 바퀴 달린 의자와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선 모습이죠. 직장인들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는 현대의 업무 환경은 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걸까요?
오피스 환경의 진화에는 수많은 요인이 작용했겠으나, 이번 보고서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요인은 기술 변화입니다. 건축 방면에서의 오피스 역사를 복기하다 보면, 생산성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신기술이 세상에 등장할 때마다, 오피스는 이를 담아내야 하는 그릇으로서, 계속해서 진화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 산업군에 걸쳐 생산성 향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려 하는 기술은 논란의 여지 없이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소프트웨어 개발, 법률, 의학, 금융과 같이 오랜 기간 전문가 수준의 기술을 갈고닦아야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지식 노동 영역까지 인간의 역할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고연봉 직장으로 알려진 투자은행이나 사모펀드 내 주니어들이 주로 도맡는 핵심 업무들인 재무 모델링, 리서치 등과 같은 작업은 현재 내로라하는 AI 기업들이 두 눈 부릅뜨고 자동화를 시도하려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가치가 높은 일을 자동화해야, AI 기업들이 돈을 벌 테니까요.
이러한 AI 기술은 점차 더 많은 산업군 내 구체적 실무 영역들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기업 경영진으로 하여금, 조직 내 구성원들의 역할, 규모, 업무 프로세스 등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하게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본 보고서는
(1) 현재 오피스 업무환경이 어떻게 기술과 함께 진화했는지,
(2) AI로 인해 업무방식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3) 미래 업무 환경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알아볼 예정입니다.
IFC나 파크원 같은 대형 크기의 오피스는 도대체 언제부터 등장했을까요? 처음부터 거대하지는 않았죠. 산업혁명 이전의 업무 환경의 규모는 가내수공업 형태 혹은 지역 유지 느낌의 사업체 수준에 머물렀었는데요. 현대 오피스 수준의 대형화는 놀랍게도 이동 기술, 그중에서도 철도의 등장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 영국과 미국의 철도 회사들은 전국 단위로 철도망을 구축하며, 처음으로 여러 법정 관할 구역에 걸쳐 사업을 펼치는 주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업을 관장하는 영역이 확장되면서, 필요한 행정 업무의 양과 복잡성 역시 극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예를 들면, 기존의 기업들은 소속된 지역의 세무, 법무, 판매 전략 등만 고민하면 되었던 수준이었으나, 이제 철도 기업들은 여러 주 혹은 국가별로 판이한 정책, 법률, 사업 전략, 민원 등을 처리하게 되었다는 뜻이죠.
복잡해지고, 방대해진 백오피스 성격의 업무들을 지역별 소재한 사무실에서 처리하게 되다보니, 기업 경영진들은 전사 단위의 사업 전략을 효과적이고 빠르게 실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여, 철도기업들은 본사 역할을 하는 거대한 오피스를 지어, 분산된 조직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의 결과로서, 최초의 기업 조직도나 대형 규모의 오피스들이 철도 기업들에 의해 고안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철도 기술의 발전은 철도 관련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대형화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도 기업으로 인해 대형화된 기업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요. 첫째는 복잡해진 철도 기업의 행정 업무를 자문하고 대행하는 전문 서비스 회사 (Professional Firm)들이었으며, 둘째는 철도 기업의 물류 서비스를 활용하는 운송 고객 기업들이었습니다.

철도기업들은 대형 로펌들의 대표적 초기 고객 산업이었음 (현대 대형 로펌의 시초, Cravath Swaine & Moore의 기업 연혁 웹페이지) 대형화가 된 첫 번째 기업 유형인 전문직 기업들은 대표적으로 대형 로펌, 회계법인, 전략 컨설팅펌, 투자은행 등이었습니다. 철도기업들은 여러 법적 관할 구역에 걸친 법무, 세무, 회계 등 관련 업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 골치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자체적으로 보유한 인력으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업무가 늘어나고 복잡해지자, 외부의 전문가 집단에 도움을 청하게 되며, 자연스레 대형 전문직펌들의 탄생에 이바지하게 되었습니다.
대형화 흐름에 영향받은 두 번째 유형인 철도 서비스 이용 기업들은, 전국 단위로 구축된 철도망을 이용해 물류 비용을 크게 절감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값싼 비용으로 아주 먼 곳까지 제품을 판매하게 되다 보니, 사업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업무 공간의 규모도 대폭 확장되었습니다.
Ch. 1.2 [업무환경 규격화] 분업, 측정, 관리를 위한 공간

대형화의 원인은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오피스를 천편일률적으로 만든 주범은 누구였을까요? 저는 프레더릭 테일러, 그리고 그가 만든 그 유명한 경영 기술, 테일러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초, 증기기관과 철도 기술로 인해, 기업들은 훨씬 더 많은 고객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대량 생산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기업들은 비대해진 업무 및 생산량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프레더릭 테일러와 같은 경영 전문가들에 의해 고안된 ‘과학적 경영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영 관리 이론인 테일러리즘은 인간의 업무를 신속하고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주된 목표입니다. 이 기술은 업무를 아주 단순한 단위로 쪼개어 작업자들에게 분배합니다. 오랜 기간 쌓아온 고난이도 기술, 제품을 획기적으로 개선 시킬 창의성 같은 개념들은 전혀 기대되지 않게 되는 구조이기도 하죠. 업무 환경 내 작업자의 지위가 장인에서 부품 내지는 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높은 효율성을 보장한 테일러리즘은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공장에 이식되었고, 결국에는 사무공간인 오피스에도 같은 개념이 녹아들게 됩니다.
그 결과 수많은 규격화된 책상들이 일렬로 배열되고, 각 직원을 감독할 중간 관리자의 책상도 주변 공간에 함께 배치된 "공장식" 업무 환경 레이아웃이 완성되었습니다. 테일러리즘의 여파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무직 업무환경 레이아웃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공장에서 비롯된 관성이 아직 지식 노동자들의 공간에 남아있는 셈이죠.
이는 자율성이나 복잡한 지식 노동의 비선형적 특성보다는 관찰 가능한 산출물과 통제를 중요시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창의성, 복잡한 문제 해결, 협업과 같은 역량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포스트 AI 시대의 시대 정신과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GUI는 말 그대로 그래픽으로 구성된 사용 환경으로서, 복잡한 컴퓨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는 직관적 행위만으로 컴퓨터라는 놀라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고마운 기술입니다.
이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꼼짝없이 명령줄 인터페이스, CLI(Command Line Interface) 기반의 컴퓨터를 사용해야 했겠죠. 간단한 문서 작업조차도, CLI 기반 컴퓨터에서는 폴더를 탐색하고, 파일을 실행하는 간단한 과정에도 명령어를 기입했어야 합니다. GUI를 개발해 준 팔로알토의 한 연구소 방향으로 매일 3번씩 절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전 인류는 크게 수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GUI 기술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의 오피스는 지금처럼 모든 이의 책상이 컴퓨터가 주인공인 모습이지는 않았습니다. 작업환경은 업무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었죠. 대표적인 예로, 설계 업무가 주요 활동인 엔지니어나 건축가의 업무 환경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닥으로부터 기울어진 제도판을 오랜 시간 업무의 중심 도구로 활용해 왔으며, 책상과 의자의 형태나 높이 등도 각각의 업무 특성에 맞게 여러 가지로 달랐습니다.


Xerox PARC 연구원들은 프로토타입 컴퓨터였던 Alto를 통해, 최초의 GUI 개념을 구현하여, 오늘날의 흔한 개인 업무 환경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워크스테이션(workstation)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Brock, 2023). 안타깝게도 연구소를 소유한 모기업, Xerox의 경영진들은 수십 년 뒤를 내다보는 비전은 없었나 봅니다. 그들은 훗날 수천조 원 규모의 경제 가치를 창출해 낼 이 혁신적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편, 당시 이 연구소 인근에 위치한 기술 스타트업, 애플 컴퓨터의 임직원들이 Xerox PARC를 방문하여 새로운 기술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 신생 기업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Alto와 GUI가 가진 잠재력을 단박에 알아차려, 그가 왜 21세기의 다빈치라고 불리게 되는지를 증명해 보이게 되죠. 애플 컴퓨터는 곧바로 GUI 상용화에 매진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PC,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근간이 되는 GUI 기반 컴퓨터들을 출시하게 됩니다.

한편, 애플 컴퓨터 생태계 내에서 엑셀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던 시애틀의 한 신생 기업 역시 비저너리 한 창업가를 보유했었습니다. 애플의 차세대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GUI가 미래임을 직감한 이 스타트업 역시 자체 GUI 운영체제인 윈도우즈를 출시하며 개인용 컴퓨터와 GUI 기술의 전 세계적 보급에 앞장서게 됩니다.
이 두 기업의 제품들로 인해 대부분의 보편적 사람도 텍스트 작성, 데이터 분석, 설계, 회계, 관리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업무를 컴퓨터로 수행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1980년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업무 환경 변화는 전 산업군에 걸쳐 업무 효율성과 접근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업무 환경을 하나의 동일한 포맷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죠.
행정 업무를 다루는 사무직부터 창의적인 업무를 하는 디자이너, 광고 기획자 등 직업 종류와 관계없이 모든 영역이 일원화된 ‘WIMP’(Windows, Icons, Menus, Pointers) 인터페이스에 맞추어 조정되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분명 GUI는 컴퓨터의 접근성과 표준화를 비약적으로 향상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적 활동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고, 키보드만 두들기고, 마우스만 움직인다고, 기업을 일으켜 세우고, 시장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업 모델이나 신기술, 묘책 등이 나올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최근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 중인 LLM 기반 AI 기술은 이러한 구조적 전제를 다시 고민하게 만듭니다. AI는 단순히 키보드로 전달받는 선형적 데이터를 넘어 언어, 시각, 제스처 등 다양한 입력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되었습니다. 마치 인간의 사고가 그러하듯 말이죠.
그래서 포스트-AI 시대의 업무 환경은 단순히 기존 WIMP 환경 위에 새로운 도구를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업무의 본질적 다양성과 인간의 인지적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상호작용 패러다임이 설계되어야 마땅합니다.


내용은 2편으로 이어집니다.
발행 | 2025.12.12
글 | 전략기획팀 손두원
그림 | 전략기획팀 양세진, 오준명, 손두원
편집 및 디자인 | 전략기획팀 오지원
문의 | strategy@ikukbo.com